티스토리 툴바

달력

052012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눈아이

2012/05/16 13:34

아오윈 아이비의 <The Snow Child>. 요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1920년 알래스카. 상처를 입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 힘들었던 중년부부 메이블과 잭은 알래스카 황량한 개척지로 이주해 외떨어져 산다. 그러나 자연은 너무 척박하고, 젊지도 않은 잭 혼자 밭을 개간하는 일은 힘에 부치고, 메이블은 자기가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잭은 학자 집안에서 귀한 딸로 태어난 메이블이 육체노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혼자 모든 짐과 책임을 떠맡는다. 잭이 메이블이 아기를 사산했을 때 메이블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 못하고 그저 등을 돌려 버린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짐을 나누지 못하고 서로 의지하지도 않으려 하고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점점 멀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메이블은 밖으로 나가 충동적으로 눈공을 만든다. 잭에게 눈뭉치를 던져 맞추자, 잭은 황당한 표정으로 잠시 보고 있다가는, 자기도 눈뭉치로 응수하기 시작한다.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은 얼음같은 침묵을 깨고 어린아이처럼 뒹굴며 놀다가 눈사람까지 만들게 된다. 잭은 눈사람의 얼굴을 만들고 메이블은 빨간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둘러준다.
다음 날 아침 잭은 눈사람이 망가지고 목도리와 장갑이 사라진 걸 발견한다. 그때 숲속에서 언뜻 여자아이의 모습 같은 걸 본다.

이렇게 해서 눈아이가 두 사람의 삶에 나타난다. 눈아이를 만나면서 두 사람의 삶은 조금씩 달라진다.



러시아 민담 <눈아이>를 모티프로 쓴 소설이다. 줄거리만 보면 빤한 동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언어와 애잔한 정서, 잔잔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사를 잘 엮었다.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자연의 묘사도 좋았고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밟아가는 설정, 서정적이지만 감상에 빠지지 않는 서술, 삶을 긍정하는 따뜻함, 자연 속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원시적 삶의 모습, 아무튼 좋은 건 다 들어가 있다.



번역하고 싶었는데.




저작자 표시
Posted by bluegoby

도둑 신부

2012/05/14 10:22

주말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둑 신부>를 봤다. 그냥 꽃뱀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다 읽고 다섯 시간 정도 지나자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대학 동창인 네 명의 여자가 나온다.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팜므파탈 지니아. 그리고 토니, 로즈, 캐리스가 있는데, 지니아는 세 여자를 이용해 선의와 돈을 뜯어 내고 세 여자의 남자도 모두 채어가 파멸시킨다. 

이 세 여자들에게는 지니아에게 엄청나게 데었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그 이전에 상처 깊은 아동기를 보냈다는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여자들에게는 두 개의 자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상처받은 나약한 존재의 이야기와, 그 상처를 극복하고 홀로 선 존재의 이야기가 자기 안에서 다툰다. 


지니아에게는, 상대에게 맞춤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다. 지니아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갈구하고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니아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는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세 여자가 지니아의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고 완전히 낚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니아의 이야기가 자신의 두번째 자아, 강한 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 주기 때문이었다. 캐리스(Charis)라는 이름은 캐런에서 스스로 바꾼 이름인데 성서에서'Charity'라는 단어를 보고 붙인 이름이다. 캐리스가 지니아에게 낚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캐리스가 다른 사람에게 자선(Charity)을 베푸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도움을 바라는 지니아가 절실히 필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지니아는 상처 많은 세 여자를 완성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소비된 것은 지니아가 아닌가?) 그래서 세 여자는 지니아에게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고 극도로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매달린다.


하지만 지니아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지만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는다. 지니아가 죽은 뒤에도,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의 거친 에너지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세 사람의 삶도 영원히 안정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것으로 삼고 의미를 부여하려 했을 때의 결과다.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의 마지막 문장이 ("There is great unrest.") 떠올랐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bluegoby

지난 주말에 애들 데리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애들 머리 자르러 미용실에 들렀다. 처음 가본 미용실이었는데, 다른 데처럼 후루룩 바리깡으로 밀어주는 게 아니라 미용사께서 스타일을 고민하면서 가위로 정성스레 오리셨다. (가격도 다른 데보다 두 배 비쌌다) 자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루종일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피곤한 2호가 참을성 없이 "힘들어" "힘들어"를 연발하더니 결국 꼬박꼬박 졸기 시작했다. 저러다 잠들면 내가 업고 집에 가야 하는데! 결국 내가 "이제 됐네요."하면서 거의 보자기를 벗기다시피 하며 끌어 내렸다. 이건 뭔지 "방망이 깎는 노인"같은 시츄에이션인데.


거의 한 시간만에 두 녀석 이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 미용실은 이제 가지 말아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얼마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나같은 출판계 하청업자는, 장인정신과 프로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겠구나 하는 뜬금없이 장대한 생각이었다.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나름 완벽을 추구하며 일하다 보면 마감날짜를 지킬 수 없음은 물론 생계 유지도 불가능하다. 프로라면 시간당 수익성을 고려하면서 일해야 할텐데, 내 이름 걸고 나름 '작품'을 내놓는 입장에서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 쉬운 책만 손대게 될 거다. 아예 매절 계약을 하지 않고 인세 계약만 하는 게 이상적인 전문가의 자세일 터이지만 인세가 현실적으로 너무 박하다. 


그 미용사 양반은 방망이 깎기의 레벨을 '고'에 맞추어 놓고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거고, 난 그냥 어중간한 걸 나름 균형이라고 삼는다. 돈을 잘 벌 수도 없고 훌륭한 번역가가 될 수도 없는 지점.

저작자 표시
Posted by bluegoby